| 이준효 목사의 목양칼럼 |십이월의 독백

기사입력 2018.11.3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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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한 번 크게 쉬고 나니 십이월의 해가 뜬다. ‘벌써의 놀란 표현도 허용치 않는 베틀의 북 같은 빠름이 십이월의 어깨 위에 목마를 태운다. 하늘도 그 하늘같고 땅도 여전히 그 땅 같은데 어째 생소한 것은 인생이런가? 손에 쥔 것도 아무것도 없건만 부끄러운 빈손으로 당신을 맞으라 하는 십이월의 주문에 심장의 거친 박동은 회개의 눈시울을 적실 뿐 묵묵부답이다. 무엇을 했는지 그 시간들이 보이지 않는다. 열매의 부재, 주님은 어떻게 정산하실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이 거세게 밀려온다. 언제부터인가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어깨가 부러워졌다. 입에 거품을 물 정도의 당찬 메신저도 부럽다. 양보하는듯하지만 제 속은 단단히 챙기는 실리주의도 부럽다.
뭔가 있을 듯한 인생, 겁 없이 덤비는 인생, 향기가 날 듯 고상함을 풍기는 인생, 전천후의 기류를 눈빛에 담은 인생, 이유 없이 여유로운 인생 등 참 부러운 인생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거대한 암벽 앞에 나뒹구는 초라한 돌멩이처럼 거대한 십이월의 의미 앞에 냉정한 심장이 쏟아 내는 잔혹한 메시지는 어김없이 불충이란 채찍이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311)는 찬송가 가사가 소명자의 심장을 강타한다. 눈물의 참회록도 능히 감당할 수 없는 불충앞에 길을 내시는 주님의 깨우침은 충성만이 유일한 길이라 하시건만 여전히 용기 잃은 양 어깨는 불충의 무게를 이겨낼 수 없다.
로뎀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은 엘리야처럼 착각의 현실 앞에 무릎 꿇는 나약한 소명자의 한계는 언제나 부정적인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다. 타협과 포기를 종용하는 세속적 가치 앞에 소명자의 정체성과 자존감으로 버텨 보지만 상황의 냉정함은 오히려 세속적 가치 앞에 무릎 꿇고 타협한 자들의 손을 들어 비웃음과 조소를 머금는다. 엘리야에게 다가와 세미한 음성으로 일깨우신 칠천 명의 보도를 전제하고 신앙과 사명의 절개를 지키려 하나 혹독한 현실은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기며 망국의 결말을 향해 질주한다. 언제부터인가 진리가 어색한 사회를 넘어 진리가 부끄러운 사회로 전락하여 이제 참된 진리가 설자리가 없다. 성경의 소리에 우이송경이 되고 진실 된 성경의 가르침에 등 돌린 교회와 세상, 이단 교주들의 먹잇감으로 전향해 가는 아이러니한 이리떼들의 기승에 통제 사회의 명철도 자취를 감추었다.
유난히도 금년 십이월은 이를 맞는 심장들이 춥다. 어떻게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을까? 유라굴로 광풍에 표류하던 바울이 생각난다. 캄캄한 대해 위에 밀려오는 광풍 앞에 죄수 아닌 죄수로 선 바울의 늠름한 기백이 차가운 심장을 뜨겁게 달군다. 누구의 작품일까? 바로 바울이 섬기는 주님의 작품이었다. 바울을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앞에 세우고자 하셨던 주께서 밤새 바울 곁에 계서 그의 심장에 불을 붙이셨다. 여기서 갑자기 욥의 고백이 떠오른다. 주신 자도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찬송을 돌렸던 그때 그 모습이 십이월의 차가운 심장을 뜨겁게 달군다. 역사의 운행자 하나님, 이 나라를 쪼개신 이도 하나님, 이 나라를 다시 기우실 이도 하나님, 이 지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붙드시는 이도 하나님, 구원과 심판의 공의 행사에 성실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사백 년의 길고 긴 침묵의 중간 시대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고 계시지 않았는가!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를 준비하시고 흑암기의 새벽을 연 생명의 빛 예수 그리스도를 어둠이 감히 몰아낼 수 없는 창조자의 권능으로 관영한 죄악의 시궁창으로 던져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바로 구속 역사의 클라이맥스를 여는 장엄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왜곡된 세속 역사는 죄악의 관영을 이루었을 때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축배의 잔을 들었다. 정치적으로 천하를 평정한 제국들의 통치자들도 그랬고, 종교적으로 군중들의 마음을 제압한 종교 지도자들의 세계도 그랬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그들의 시간에 고난의 쓴 잔을 마시며 인류의 무거운 죄를 짊어진 양 어깨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떼어 놓으시며 골고다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셨다.
당신의 그 모습을 보며 오로지 당신의 그 길을 따르라 하신 주님의 간곡한 당부가 성경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어 성경에서 감히 눈을 뗄 수가 없다. 주님 가신 길, 사나 죽으나 따르리라 결심하며 세상의 모든 부러움들을 제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다. 그 십자가 앞에 무슨 고집이 중요하며 무슨 아집이 대수이련가! 세상이 평가하는 성공의 잣대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크고 작음의 의미가 무슨 자랑거리와 부끄러움의 준거가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언약을 평정했던 신실한 성군 다윗도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간다라고 고백하며 역사의 현장에서 그 이력서를 마무리하였으며, 전무후무한 부귀와 영화의 왕좌에서 평화의 왕으로 추앙받았던 솔로몬도 역시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 아비의 저울에 미치지 못했다는 하나님의 준엄한 평가를 받으며 분열 왕국으로 가는 통일 이스라엘의 미래를 어거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자부하거나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 없는 것이 십이월이 우리 인생에게 주는 아이러니한 선물이다. 한 해를 쉬지 않고 달려왔건만 이 십이월을 맞는 심장은 온통 회개의 죄목들로 가득 채운다.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라 하셨건만 왠지 불충의 흔적들만이 결산의 여백을 채울 뿐이다. 어느새 새미 한 주님의 음성이 심장을 노크한다. ‘사랑하는 나의 종아! 내가 네게 준 사명이 어찌 금년의 십이월로 끝이겠느냐? 네게 남은 여정이 저기 서녘으로 기우는 태양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음인 것을 알라! 궁극으로 가는 과정에서 어찌 실패가 있겠느냐? 나 여호와의 궁극은 너희 실패와 성공에 의존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 여호와의 뜻을 이루느니라! 나 여호와가 멈추게 하지 않는 한 내년에도 반드시 저 태양은 동녘을 붉게 물들일 것이며 또한 해를 기우는 저 서녘 노을도 수없이 반복될 것이니라! 이제 네 꿇은 무릎을 곧게 펴고 그 옛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했던 여호수아처럼 너 역시 영적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귓전에 들리는 듯 십이월을 맞는 심장이 박동하며 여전히 이내 맞을 신년을 향해 고개를 고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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