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 '어빈 의사 (Dr Charles Irvin)'
기사입력 2018.09.0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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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어빈 의사 (Dr Charles Irvin)찰스 어빈의사에 대해서는 잘못된 기록들이 많고, 확인되지 않는 훙미위주의 애정사건까지 회자되고 있고, 부정확한 기록의 복재와 재생산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다 정확한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여기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제시하고자 한다.부산에 온 첫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는 윌리엄 베어드(Rev William M. Baird, 裵緯良, 1862-1931)였다. 1891년 9월 부산으로 온 그는 1895년까지 4년간 부산에서 일하다가 대구에서 잠시 체류한 후 서울로 옮겨갔다. 2년 후인 1897년에는 다시 평양지부로 배속되어 평양으로 옮겨갔다. 그가 부산에서 일한 4년간은 부산에서의 북장로교 선교활동의 시원이자 부산지방 기독교운동의 기원이 된다. 베어드에 이어 두 번째로 부산에 부임한 북장로교 선교사는 1891년 12월 부산에 온 의료선교사 휴 브라운(Dr Hugh M. Brown, 1867-1896) 부부였다. 부부가 의사였던 이들은 부산에 온 첫 의료선교사로서 자기 집에 작은 시약소(dispensary)를 마련하고 의료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브라운 의사의 예기치 못한 결핵의 감염으로 부산에 온지 2년 후인 1893년 말까지 사역하고 1894년 1월 8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2년이 채 못 되어 1896년 2월 뉴욕에서 병사했다. 브라운에 이어 부산에 온 북장로교 의료선교사가 찰스 어빈(Dr Charles. H. Irvin, 漁乙彬, 1869-1933)이었다.오하이오주 슈리브(Shreve)에서 1869년 2월 15일 출생한 그는 1888년 6월 슈리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하이오주 컬럼부스에 소재한 오하이오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5년간 수학한 후 1893년 3월 졸업하고 의사(MD)가 되었다. 당시 거주지인 오하이오주 만스필드(Mansfields)의 제일장로교회에 출석하던 그는 의료선교를 자원하였고, 1893년 4월 3일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30일 미국을 출발하여 11월에 아내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어빈은 선교사로 임명된 후인 1893년 8월 10일 베르타(Bertha Kimerer)와 결혼했는데, 베르타는 1868년 7월 29일 생으로 오하이오주 슈리브에 거주하던 여성이었다.내한한 어빈은 1894년 3월 부산으로 와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료활동 외에도 베어드와 함께 지역 순회활동에 동참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료, 전도활동을 전개했다. 어빈은 이때로부터 1910년 10월까지 약 16년간 선교사로 일하고, 1910년 10월 17일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그해 4월 1일자로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는 기록은 옳지 않다. 선교사직을 사임한 그는 부산에 남아 동광동 5가 영선고개 현재의 코모도호텔 맞은 편 염광교회 근처에 ‘어빈의원’을 개원하고 의료활동을 계속했다.그가 선교사직을 사임하게 된 것은 가정생활이 원만치 못해 부인과 이혼했기 때문이었고, 후에는 20여년 연하였던 양유식(1888- )이라는 한국여성과 재혼했다. 양유식은 부산시장을 역임했던 양성봉 장로의 둘째 누나였다. 어빈 의사는 당시 한국에서 유명한 의사로 알려졌고 만병통치약인 ‘만병수’(萬病水)를 개발하여 환자들을 치료하였을 뿐 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많은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 40년간 한국에 체류했던 그는 1933년 2월 9일 부산에서 사망했고 복병산에 묻혔다.그의 부인 Bertha K. Irvin(결혼 전 이름 Bertha Kimerer)은 1899년 부산에 규범학교를 설립하는 등 선교사로 봉사했으나, 남편과 이혼한 이후 일본으로 가 도지샤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사제를 털어 쿄또의 한국인 교회인 교또중앙교회당을 건축하는데 기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35년 11월15일 찍은 어빈여사 및 최경학 목사 송별기념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베르타는 1935년 11월까지 일본 교또에서 아들 로드릭(Roderick Irvin)과 같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로드릭은 일본의 곡산(穀産)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미국회사로 강냉이로 식품을 만드는 회사로서 평양에도 공장을 두고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베르타는 1940년 캘리포니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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