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

성경구락부 운동을 전개한 권세열 선교사
기사입력 2018.07.3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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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열(權世烈)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 1904-1992) 선교사는 한국의 불우 청소년 교육을 위해 성경구락부를 조직하여 직업교육을 실시했던 인물이자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숭실학교 교수였다. 해방 후 다시 내한한 그는 6.25 동란 중 한국에서의 군목 제도를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1948년 이후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던 인물로서 한국교회의 성장과 분열의 현장에서 한국교회 형성에 기여하였다. 그를 시작으로 3대 째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가문이기도 하다.
프란시스 킨슬러는 1904113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했다. 1925년에는 메리 빌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톤신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1928년에는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했다. 프린스톤신학교 3학년 때인 1927년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일주일 간 선교학을 강의했던 한국선교사 맥쿤(George McCune)의 강의와 권면을 받고 한국선교사를 자원한 그는 1928104일에는 미국북장로교 선교부 파송을 받아 24세의 미혼 청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부터 숭실학교 강사로 일하는 한편 성경구락부 운동을 시작했다. 1930년에는 동료선교사였던 도로시(Dorothy Woodruff Kinsler, 권도희, 1907-2001)와 결혼했다. 1907620일 미국 뉴저지(Trenton)에서 출생한 도로시는 윌슨대학을 졸업하고 1930912일 내한하여 평양선교부에 배속되어 활동하던 중 프란시스 킨슬러와 결혼한 것이다.
킨슬러는 평양 보통강 주변의 초라한 흑벽돌 집에서 거주하는 6명의 걸인소년을 발견하고 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함께 지내면서 평양광문서림 2층을 빌려 개척구락부’(Pioneer club)라는 이름의 학원을 설립하고 글과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를 시작으로 불우 청소년을 모집하여 교육시키는 성경구락부 운동이 시작되었다. ‘개척구락부라는 이름이 항일(抗日) 단체로 오인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조선총독부는 이름을 고쳐 줄 것을 요구하여 1933년에는 성경구락부(Children's Bible of Korea)’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성경구락부 운동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종교, 지육(智育) 체육, 봉사의 4대 원칙에 따라 교육을 실시했는데, 개척구락부를 시작한지 2년이 지난 후 7개 구락부가 신설되었고, 학생 수는 15백 명에 달했다. 신사참배가 강요되던 1938년에는 약 5천명으로, 1940년 초에는 학생수가 1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성경구락부는 한국의 청소년 교육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킨슬러가 교수로 봉사하던 숭실학교 학생들이 교사로 활동했고, 특히 후일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방지일 강신명 김치선 최영일 목사 등이 성경구락부 교사로 활동한 바 있다. 일제는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활동을 하던 성경구락부 교육에도 간섭하고 탄압했다. 민족정신을 고취하지 못하게 하고 봉선화같은 노래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구락부는 날로 번창하였는데 1938년에는 강제로 구락부를 폐쇄시키는 등 탄압을 가했다.
킨슬러 목사는 1940년 일제의 강요로 한국을 떠났으나 1948년 다시 내한하였다. 그리고 대구와 서울에서 다시 성경구락부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전쟁 전후 가난한 청소년들의 배움의 터전이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전쟁 중에는 피난지인 부산, 거제도, 제주도 등지에까지 성경구락부가 조직되었다. 그 결과 1970년에는 직업 청소년학교가 전국적으로 800여개에 달했다. 이 학교에 재학했던 학생 중 80% 정도가 신자가 되었고, 성경구락부 운동을 통해 1만여 교회가 설립되었고, 40여개의 기독교중고등학교가 세워지고, 200여명의 목사를 배출한 것으로 보고 되었다(크리스찬신문. 1992. 2.1일자).
해방 후 서울에서 박형룡 중심으로 서울 남산에 장로교신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교수로, 1952년 전쟁 중 대구에서 총회신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교장서리로, 그리고 교수로 참여했던 권세열 선교사는 1970년까지 장로교신학대학 교수로 신약을 가르쳤다. 주경신학, 기독교와 민주주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기독교교육 등을 강의했다. 6.25 전쟁 중에는 미국에서의 군목제도를 모델로 한국의 군목제도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또 피난민 구호와 포로 선교에도 힘썼다. 195157일에는 미국연합장로회 한국선교사 대표가 되었다. 1965년에는 청소년교육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외국인에게 수여된 첫 문화훈장이었다고 한다.
여러 분야에서 40여 년 간 활동했던 킨슬러는 1970914일 한국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롱아일랜드의 센터모리츠교회에서 1976년까지 목회했다. 그 후에는 한인교회를 위해 봉사했고, 여러 차례 한국을 다시 방문한 바 있다. 1985년에 이어 1991925일에는 총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제자들과 재회한 일이 있다. 미국에서 노후를 보내던 그는 199219일 오전 10, 캘리포니아 두아르테(Duarte)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묘비에는 “Served Korea for Christ 1928-1970”라고 새겨두었다. 남편의 성경구락부 사업을 도우면서 고아 자선사업과 장애인 수양부모로 헌신했던 도로시는 장로회신학교에서 영어교사로 1970년까지 활동하다가 남편과 함께 한국을 떠났고, 2001314일 미국 캘리포니아 파사데나(Pasadena)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헬렌, 아더(Arthur W. Kinsler, 권오덕), 로스 등 3남매를 두었는데, 아더는 한국 선교사가, 로스는 코스타리카 선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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