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

조지 맥쿤 (George S. McCune, 尹山溫)
기사입력 2018.06.0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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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맥쿤 (George S. McCune, 尹山溫)
평안도 지역의 대표적인 선교사였던 미국북장로교의 조지 맥쿤(George S. McCune, 1872-1941)은 윤산온(尹山溫)이라는 한국이름을 널리 알려져 있다. 거물급 선교사로 한국에서의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에도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중엽 신사참배 요구를 거절하여 한국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의지를 분명하게 천명해 준 인물이 맥쿤 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두 번 추방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자기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자기 신념의 희생자였다. 따라서 그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한국교회사는 물로 한국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18721215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출생했다. 건축과 페인드 공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1885년 그가 12살 때 세상을 떠났다. 1905년 내한하게 되지만 한국에 오기 전 교사로 일한 바 있다. 즉 초등학교(1890-1892)와 파크중학교(1893-1897)에서 교사로 일했고, 그 후 파크대학(Park college)에서 공부했다. 미조리주 파크빌(Parkville)에 위치한 파크대학은 조지 파크(George Park)가 기부한 대지에 존 맥피(John A. McAfee)1875년 설립한 대학인데, 이 학교에는 자조부(自助部)를 두어 돈이 없는 학생도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학교였다. 평양의 숭실학교는 바로 이 파크대학을 모델로 설립한 학교였고 숭실에도 자조부를 두어 가난한 학생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1901년 파크대학을 졸업한 맥쿤은 미조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얻고 파크대학 설립자의 외동딸 헬렌 맥피(Helen McAfee, 1872-1952)1904년 결혼했다. 19055월에 목사안수를 받고 4개월 후인 912일 교육선교사로 내한 한 것이다. 내한한 매쿤은 평양지부에 배속되었고 아내와 함께 평양에서 4년간 조선어를 공부하는 한편 윌리엄 베어드를 도와 숭실학교에서 협력했다. 그가 이곳에서 일할 때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대부흥을 목격하였고 회개의 역사로부터 촉발된 이 부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중요한 기록,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The Holy Spirit in Pyeng Yang”(KMF, Vol. 3. 19071, 1~2]라는 기록은 남겨주었다.
1908년에는 그의 여동생 캐서린 맥쿤(Catherine A. McCune, 1880-1942)이 선교사로 내한하여 재령지부에 배속되었다. 맨쿤 자신은 1909년에는 선천선교부로 전임되어 선천의 신성(神聖)중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그의 아내는 보성(保聖)여자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191011월 한국을 방문했던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선교부총무였던 프랭크 패이튼(Frank H. L. Paton)이 선천을 방문했을 때 이 신성중학교를 방문하고 맥쿤을 만났던 일도 있다. 당시 선천지역은 평양을 비롯한 황해도 안악, 평안북도의 정주 등과 더불어 일제의 관찰지역이었다. 따라서 신성중학교는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대성학교와 함께 사찰대상이었다. 이곳에서 사역하는 기간 31.만세운동이 발발했는데, 이 때 매쿤은 시위학생들을 숨겨주거나 만세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이를 전후한 반일 활동으로 일제의 미움을 받은 그는 1921년 초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28년까지 휴론대학(Huron College)의 학장으로 일했다. 1928년 다시 내한한 그는 평양지부로 배속되어 숭실 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Christian Union College)의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시설을 확충하고 한국사회에 필요한 상학과를 설치하는 등 교육을 통한 한국사회 변혁을 의도했고 인재 발굴에 관심을 두었다. 이미 신성학교 출신 백낙준(1895-1985)을 중국에서 공부하게 한 후 장인이 설립한 미국 파크대학으로 보내 공부하게 하고 후일 예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인도했다.
그가 숭실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1935년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해 1114일 평남도청에서 개최된 도내 공?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의가 소집되었는데, 도지사는 참석한 교장들에 개회 전 평양신사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 매쿤은 참배를 거부했다. 이때부터 매쿤은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고, 일제로 볼 때는 요주의 인물로 간주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는 단순한 국민의례라고 주장했으나 매쿤은 그것은 명백한 우상숭배이며 십계명의 요구를 거역하는 것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신사참배 강요는 부당한 신교의 자유를 위반하는 탄압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매쿤은 결국 1936118일에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군국주의 일제의 전쟁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파악한 일제는 곧 추방명령을 내렸고, 매쿤은 1936321일 평양시민들의 애정어린 전송을 받으면서 한국을 떠났다. 그가 한국에 체류한 기간은 26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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