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현 교수의 '인물로 본 한국교회 설교사(1)'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세계
기사입력 2018.03.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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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선교사들의 설교세계
하나님은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하나님의 경륜(經綸)과 섭리(攝理)에 따라서 다스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래서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교회의 역사라고 한다면, 다간(Edwin C. Dargan)교회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라 했다. 왜냐하면 설교를 자세히 연구하면 그 당시 교회의 사건이나 사상과 신앙의 이슈를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초기 선교사(아펜젤러, 언더우드, 게일, 마포삼열, 곽안련)들을 중심으로 설교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선교사들의 입국과 사역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시기는 이미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서양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한미통상조약’(1882)이 체결되게 하셔서 선교의 문을 열어놓으셨다. 김인수는 그의 책 한국기독교회사에서 미국 의사 선교사인 알렌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그리고 미국 북 감리교회 선교사인 아펜젤러의 입국 경위와 사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8849월에 미국 북 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H. N. Allen, 1858-1932)이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내한하였다. 그래서 1884년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점이 되는 해이다. 안수 받은 목사 선교사로서 처음으로 한국에 발을 디딘 사람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였다. 그는 화란 계통의 개혁교회 계통의 뉴브른스윅(New Brnswick)신학교를 1884년에 졸업하고, 25세에 미국 북 장로교의 젊은 선교사로서, 미국 북 감리교회의 선교사인 아펜젤라(Henry G. Appenzeller, 1858-1902) 부부를 만나서 188545일 부활절 주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한국 땅에 동시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국내 정황이 좋지 않게 되자 언더우드 부부는 입국을 허락하였지만, 임신한 부인 때문에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두달 후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언더우드는 알렌이 갓 시작한 제중원에서 첫 사역을 함으로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한국에서 의료선교를 통해 선교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정치적인 혼란스런 와중에도 또 한분의 선교사가 캐나다에서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바로 게일(James S. Gale, 1863-1937)이다. 게일은 토론토대학 YMCA 선교사(후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활동)18881215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연동교회 초대목사로, 성서번역자로,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특히 한국학 연구(Korea Grammatical Form, 1884)를 통하여 외국에 한국어를 알렸다. 다음으로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 선교사이다. 그는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 장로교회 선교사로 파송받아서 1890125(26)에 내한 했다. 1893년 그는 평양최초의 교회인 장대현 교회(구 널다리골 교회)를 설립하여 담임목사로서 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1907년까지 시무하였다. 그는 1904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으로 20년 동안 봉직하면서 1912712일 한국최초의 7인에게 목사안수를 주었다. 그는 책 한권도 집필을 하지는 않았지만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이룩한 그의 수고와 열정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곽안련(Charles. A. Clark, 1878-1961) 선교사이다. 그는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 받아서 한국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머물면서 곤당골 교회(현 승동교회)를 개척하여 20년 동안 시무하였다. 1908년부터 평양장로회 신학교 실천신학 교수로 취임하여 1940년 학교가 폐교 될 때까지 시무하였다. 그는 설교 및 목회학 분야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특히 강도요령(講道要領)이라는 설교학 교과서는 한국인 설교학 교수가 설교학 교과서를 저작하기 전까지 보물과 같은 서적이었다.
 
2. 선교사들의 설교 특징들
첫째, 초기 선교사들은 근본적인 신학을 기반으로 한 청교도유형(Puritan type)의 설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1870-1925)까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철저한 보수주의에다 청교도적 엄격성을 견지한 개혁파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전역을 휩쓴 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선교사로 지원한 신학성향 때문에 예전(禮典, Liturgy)보다는 복음적 열정과 뜨거운 영성, 전도중심, 간단한 집회형식의 예배, 그리고 회심을 강조한 설교 중심적 사역으로 한국에서 선교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설교초점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천당과 지옥이 주요 주제였다. 그리고 이들의 설교는 이원론에 근거하였으며, 민족의 현실이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반면에 장래에 펼쳐질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는 설교였으며, 전 천년설에 기초한 종말론적인 재림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청교도적 신학의 특징에 입각한 설교들이었다.
둘째, 선교사들의 설교의 주 형태는 삼대지 주제설교였다. 이는 미국교회에서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유행한 설교 방법으로 선교사들이 자국에서 배운 설교방법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설교했고 한국인들에게 가르쳤다. 정성구는 한국교회 설교사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특징에 대하여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특징은 미국에서 1900년대 초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제목설교(주제설교를 가리킴)로서 많은 예화를 필요로 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예화를 많이 권장함으로, 상대적으로 교리설교에 대한 흥미를 감소시켰다. 또한 설교에서 성경신학에 대한 이해보다는 조직신학에 대한 접근만 있었다. 이러한 삼대지 주제설교는 한국교회 강단에 100년 동안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는 청교도적인 열심은 있었지만 신학적으로는 부족했음을 저들의 설교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셋째,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불신자를 구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선교사들은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설교에 두었다. 그리고 설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불신자를 구원하는 것으로 설교의 모든 역량을 이곳에 총동원했다.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선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서 전도와 설교를 통하여 불신자를 회심케 하여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설교의 목적은 늘 불신자의 구원에 정조준 되었다. 넷째, 정교분리의 원칙에 입각한 설교였다. 선교사들의 내한을 기점으로 한국은 일본에 의해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1910년에 급기야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었다. 이런 침울한 분위기는 예배 안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들은 교회와 예배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온전히 예배하는 곳이지, 교회가 애국애족의 단체가 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였다. 급기야 선교사들은 교회의 예배당은 나라 일을 보는 곳이 아니기에, 이곳에서 나라 일을 의논하거나 공론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는 선교사들의 보수적이고 비정치적인 신학으로 인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발로(發露)였다.
 
3. 나가는 말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복음을 증거 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들의 열심과 전도, 의료 및 교육사업, 특히 지칠 줄 모르는 설교여행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복음이 전파 된지 130년이 넘는 한국교회가 그들에게 배워야 할 중요한 점은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며 설교했던 그 열정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조성현.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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