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의 선교사이야기 "린튼가의 선교사들3"

기사입력 2018.02.23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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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튼가의 선교사들3
<휴 린튼 Hugh MacIntyre Linton, 1926-1984>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이 휴 린튼인데, 1926년 군산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가 신사참배 거부로 19401114일 한국에서 추방될 때 휴 린튼은 14세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어스킨대학에서 수학하고(1944~1947), 콜롬비아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950년 졸업했다. 1948년 혹은 49년에는 로이스(Lois, 인애자, 1927-?)와 결혼했다. 1927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출생한 로이스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어스킨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1948년 조지아 주 컬럼비아 신학대학에서 수학했다. 그 무렵 해군 장교로 복무하던 휴 린튼과 결혼했다.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한 휴 린튼은 졸업과 동시에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미해군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였고, 그 후 학위과정을 마치고 1953년에는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수학의 과정을 마친 그는 1953년 남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54년에는 아내 로이스와 세 아들과 함께 제3대 선교사로 내한했다. 내한 한 그는 선대가 개척한 순천지방에서 일했다. 특히 순천과 그 인근의 섬마을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복음 전도자로 활동했다. 그가 집을 나서면 2, 3일은 보통이고 10일간, 혹은 3, 4주 간 지역 여행을 하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이런 전도활동을 통해 섬 지방과 벽지 200여 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가 귀가하면 아내는 먼저 목욕부터 하라고 했을 만큼 벽촌을 다니며 먼지 묻은 옷으로 일했다고 한다.
휴 린튼은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자신을 가난한 한국인과 동일시하고 한국인처럼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고 다녔다고 한다. 이동할 때도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길거리에서 고구마나 풀빵을 사서 먹기도 했다고 한다. 고무신이 다 닳아 구멍이 생기면 타이어 수리하듯이 땜질을 해 신고 다녀 사람들은 그를 순천의 검정 고무신으로 불렀다고 한다. 교회 개척을 위해 남도 섬마을 농어촌을 다니면서 가난하고 지친 한국인들을 보고, 린튼은 196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에 걸쳐 광양 바닷물을 막아 대대적인 간척 사업을 하며 20만 평의 땅을 개간하여 땅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인을 사랑했고, 한국인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후와 부인은 1960년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나 결핵이 만연해지자 이곳에 보양원이라는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설립하여 결핵퇴치사업을 전개했다. 이런 공로로 1996년 로이스(Lois, 인애자)는 호암상을 수상했고 상금으로 받은 5천만원으로 북한에 앰뷸런스를 기증했다.
필자가 고려신학대학 학생일 때 휴 린튼 곧 인휴 선교사는 학교 채플에 와서 설교한 일이 있고, 그가 1984410일 한국에서 사망했을 때 곧 그 소식이 고려신학대학에 알려져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던 일이 기억난다. 1984410, 농촌교회 건축용 자재를 트레일러에 싣고 순천 요양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지프 뒤에 건축 자재를 실은 트레일러를 달고 회전하는 차를 맞은편에서 오던 관광버스가 그대로 들이받았다. 관광버스 운전기사는 음주상태였다. 이때 휴 린튼은 차에서 튕겨 나와 논바닥에 떨어졌다. 이때 응급차가 없어 택시에 실려 광주기독병원으로 가던 중 휴 린튼은 58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때 응급차 앰뷸런스만 있었다면 그는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애석히 여긴 그의 아들 존(인요한)은 훗날 한국의 응급 의료 체계를 혁신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실로 좁은 길에도 쉽게 달릴 수 있는 한국형 응급차를 개발하게 된다. 휴 린튼의 부인은 한국에서 40년간 의료활동을 한 공로로 호암상을 수상했고, 윌리험 린튼, 곧 인돈의 4남인 토마스 린튼(Thomas Dwight Linton, 인도아, 1927-?) 또한 한국선교사로 일했다. 전북 전주에서 출생한 그는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수학하고 미국으로 가 리치몬드대학을 졸업하고(1949) 콜롬비아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훈련과정과 석사학위를 마치고 1952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3년 내한한 그는 광주지부에서 사역하면서 1960년 호남신학교 개교 때부터 강의하기 시작하여 조직신학교수로 활동했고, 1974년에는 교장으로 봉사했다. 197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그런데 인휴 선교사는 51녀를 두었는데, 이 중 스티븐(인세반)과 존(인요한)이 아버지를 이어 4대 째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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