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로 보는 종교개혁(14)

마틴 부처(Martin Bucher)의 설교세계
기사입력 2018.02.2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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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 보는 종교개혁(14)
마틴 부처(Martin Bucher)의 설교세계
 
들어가는 말
개혁교회에서는 칼빈을 개혁교회의 아버지’, ‘장로교 신학의 대부(代父)’로 불리 운다. 그리고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를 성서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신정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칼빈의 생애 및 사상과 신학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종교개혁자가 있다. 바로 마틴 부처(Martin Bucher, 1491-1551)이다. 그러나 루터, 칼빈, 츠빙글리, 그리고 낙스와 같은 중요한 종교개혁자의 반열에서 제외되어 늘 변방에만 맴돈 잊혀 진 종교개혁자이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진주를 캐내는 심정으로 부처의 사상과 설교 여행을 떠나 보자.
부처의 생애와 사상
마틴 부처가 종교개혁이 왕성하게 불붙고 있던 시점에 열심히 활동했고 칼빈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개혁자들에 비하여 잊혀 진 종교개혁자로서 남아 있게 된 이유에 대하여 부처에 대한 권위자인 최윤배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했다. “마르틴 부처는 그의 사후(死後) 어느 도시에서도, 어느 나라에서도 추앙을 받지 못하고 교회와 역사로부터 완전히 잊혀졌다. 왜냐하면 그가 태어나고 25년간 목회사역을 하고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유산을 남겨 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가 독일 땅일 때에는 루터파 신학자들이 그곳을 점령하여 부처의 유산을 파괴하였고, 프랑스 땅일 때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예속되어 그의 유산이 잊혀 져 버렸기 때문이다부처의 이러한 어려운 정치적 상황은 그의 사역의 보배로움에 비하여 안타까움으로 전락하였다.
마르틴 부처는 14911111일에 남부독일 엘자스 지방의 쉘레트쉬타트(Schlettstatt)에서 태어났다. 부처는 15세 때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하이델베르크 도미니칸 수도원으로 옮겨서 인문주의를 계속 공부했다. 그러나 부처에게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는데, 15184월에 루터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로마가톨릭과 신학논쟁을 할 때 루터의 말에 감동을 받아서 루터처럼 종교개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전향했다. 그 후 부처는 로마가톨릭과 결별하기 위해 수도원에서의 맹세(서약)를 해제해 줄 것을 교황에게 1521년에 요청하여 그의 수도원서약은 해제되었다. 그 후 1522년에 수녀였던 엘리사벳 질버라이젠(Elisabeth Silbereisen)과 결혼하고, 1522년 겨울 내내 바이센부르크(Weissenburg)에서 종교개혁 사상이 담긴 복음적 설교를 했다. 1523년에 자신의 고향인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와서 종교개혁운동을 1523년부터 1549년까지 활발하게 사역했다.
화해와 관용의 대명사인 부처는 루터주의와 츠빙글리주의의 성찬신학의 일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으나 좋은 결실은 맺지 못했다. 특별히 부처는 그가 일생을 사랑하고 사역했던 스트라스부르에서 귀한 사역을 하였지만, 로마가톨릭과 종교개혁진영의 전쟁에서 로마가톨릭이 승리함에 따라 그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트라스부르에서 종교개혁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어 부득불 그 지역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하여 부처는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1551년에 영국에 있는 캠브리지 대학교(the University of Cambridge)의 신학교수로 직을 옮겨서 연구사역을 다 마치고 일생을 마감했다.
 
칼빈과 부처의 동역사역
칼빈과 부처는 삶과 사역의 모든 면에서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8년 연상인 부처는 칼빈에게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칼빈과 파렐이 인간적인 부분에 중요한 관계가 있었다면, 부처는 칼빈에게 인격적인 면을 포함하면서 사역과 신학에서 깊은 영향을 주었다. 부처는 초기에는 루터의 영향을 받았지만 후에는 츠빙글리의 영향 하에서 자신의 신학사상을 가미해 칼빈에게 신학사상을 전수했다.
파렐의 간곡한 요청으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펼친 칼빈은 성찬문제로 제네바 시의회의 반대에 부딪히고 충돌하여 급기야 15384월에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독일어권 회중을 위해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를 하였던 부처는 백수가 되어버린 칼빈에게 스트라스부르에 와서 사역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부처의 강권적인 초청으로 칼빈은 15389월 초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해 방패교회(Bouclier church)에서 목회사역을 했다. 부처를 스승이면서 친구로 삼으면서 살았던 칼빈의 스트라스부르 목회의 시기에 대하여 라토릭(Kenneth Scott Latourette)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한 3년 동안은 다른 어느 곳에서 사역했을 때보다 행복했고 평화로운 목회를 했다고 술회하였다.
칼빈은 1540년 부처의 중매로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된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 머문 지 3년 만에 제네바 교회가 다시 그를 청하게 되는데 칼빈은 정중하게 청함을 거절했지만, 부처가 다시 한번 강권함으로 허락을 하여 칼빈의 제2차 제네바 사역(1541-64)20년 이상 힘차게 진행되었다.
 
부처의 설교와 예배
부처의 설교는 그의 동역자인 칼빈과 너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칼빈의 설교가 2,000편 이상 보존되어 있으며 매주 훌륭한 연속 강해설교를 했던 것과 달리, 부처는 위대한 설교자 보다는 강의와 성경주석을 비롯한 저작활동에 심혈을 기울인 신학자요, 교수로서 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필체와 저작들에 대하여 칼빈은 매우 우호적이었지만 부처의 저술은 매우 애매모호하며(obscure), 불명확하며(ambiguous), 비틀린(tortuous) 표현을 했다하였다. 또한 다간은 부처의 설교에 대하여 엄격히 말하면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유작(remain)은 없다. 만일 그의 설교가 그의 저술과 같다면 회중은 그의 설교를 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좋은 목소리의 소유자이며, 좋은 풍채를 가지고 있으며, 강단에서 오랫동안 그리고 성공적인 사역을 하였다고 언급했다.
부처가 남긴 개혁교회의 공헌은 예배부분이다. 그는 개혁교회의 원조 격인 스트라스부르의 성 토마스교회에서의 예배형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성찬과 설교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에서 맥스웰(William D. Maxwell)기독교 예배의 역사에서 언급하길 스트라스부르는 루터의 영향이 지배적이었으나, 부처가 감독이 된 후 츠빙글리의 영향이 스트라스부르에 미쳤다. 그러므로 스트라스브르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중간지점에 서게 됨으로 개혁교회의 예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군(family)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그림(Harold J. Grimm)은 부처의 예배학적 공로에 대하여 부처에 의해서 스트라스부르에서 개발된 개신교 예전을 칼빈은 그것을 번역하고 응용하여 (제네바에서) 발전시켜 사용하였다고 했다. 이는 개혁교회 예배의 이상적인 형태인 말씀의 예전성찬의 예전의 균형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처는 설교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예배에서는 아름다운 개혁교회의 이정표를 제시한 개혁자이다.
나가는 말
부처의 설교에 관한 특별함과 탁월함을 찾기는 쉽지 않았지만, 화해와 교회일치를 향한 그의 꾸준한 정신과 노력은 감탄할 만하다. 130여년을 넘는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는 분열을 통한 성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저들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옵소서”(17)라고 기도하신 주님의 대제사장의 중보기도가 무던히도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조성현.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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