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현 교수 -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의 설교세계

설교로 보는 종교개혁(13)
기사입력 2018.01.2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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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현 교수(부산장신대 설교학 겸임교수PhD)
 
설교로 보는 종교개혁(13)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의 설교세계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주연(主演)에만 주목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조연(助演)없이 주연 없다는 말은 종교개혁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 마틴 루터라는 주연이 주연되는 데는 아름다운 조연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이다. 그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루터를 아름답게 빛나게 한 숨어있는 진주이기에 더욱 값진 분이시다. 비록 평신도 신분으로 설교단에서 과감하게 외친 설교는 없지만 루터의 동역자로서 조력자로서 가치는 남다르다. 그의 생애와 신학사상의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자.
 
멜란히톤의 생애와 사상
필립 멜란히톤은 1497216일에 독일의 서남부 지방 칼스루헤(Karlsruhe) 동쪽에 있는 브레덴(Bretten)에서 태어났다. 루터보다 14년 연하인 셈이다. 10살이 되었을 때 라틴어 학교를 다녔으며, 거기서 희랍어와 시문학을 배웠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서도 공부했다. 그는 150912살에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대학에서 공부하고, 그 후 3년 후 튀빙겐 대학교에 가서 공부하여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518년에 21살의 나이에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의 희랍어 교수로 취임했다(루터가 비텐베르그 성교회에 95 논제를 붙인지 10개월 후였다. 그는 주의 품에 안길 때까지 이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1521년에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 교과서라 볼 수 있는 신학총론(Loci Communes)을 출판했는데, 이는 루터신학의 정수를 담은 것이었다. 또한 그는 1530년에는 아우스부르그 신앙고백’(Confessio Augstana, Augsburg Confession)의 기초를 놓았다. 이는 루터교회 신앙고백의 원조로서 루터파가 로마교회로 부터 멀리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믿음으로 의롭다는 신교정신을 보여주는 신앙고백이다. 단 성자들의 도고, 희생미사, 수도원서약 등은 거부되었다. 교회간의 일치점을 보여주려고 작성한 멜란히톤은 그 당시 종교개혁자들 간의 신학적 이견을 조정하고 화해하려는 조정자 역할을 했다. 이는 멜란히톤의 신학이 관용, 이해, 그리고 온유한 인격의 반영임을 알 수 있다.
 
루터와 멜랑히톤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을 당긴 종교개혁의 엘리야라 한다면, 멜란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마지막까지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서재에서 탐구의 열을 올려 그 당시 지성인들을 이해시키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기초를 든든히 세우는데 큰 공이 있다. 루터와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의 동지로서 수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여러 면에서 비교 대조가 된다. 첫째, 루터가 북부독일 태생으로 시골 출신으로서 남성적인 외모와 기질을 가진데 비해, 멜란히톤은 남부독일 출신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여 왜소한 신장에 여성과 같은 부드러움을 가졌다. 둘째, 루터가 젊은 시절부터 많은 영적 고민과 수도원의 금욕적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멜란히톤은 유년시절부터 인문주의의 강한 영향을 입어 성장하여 학문적으로 잘 다져진 학자였다. 멜란히톤이 얼마나 학문적인 열정을 가지고 살았는지 그의 집 표지판에는 여기서 필립 멜란히톤이 살았고 공부했고 죽었다고 명시를 해놓았다.
셋째, 루터가 성만찬시 공재설을 주장하였다면, 멜란히톤은 칼빈에 더 가까운 영적 임재설을 주장했다. 넷째, 루터가 예수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과 신앙적 경험을 강조했다면, 멜란히톤은 신앙의 체험적인 면보다는 지적인 면에 더욱 가치를 두었다. 지적인 능력이 출중한 멜란히톤에 대하여 루터는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멜란히톤의 신학적 소양과 학문적 능력을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심지어 멜란히톤의 신학총론을 자기의 저술보다 더 훌륭하다고 과감히 칭찬을 하였다.
루터와 멜란히톤은 함께 살고 함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종교개혁의 동지였다. 1520년에 멜란히톤은 말하길 나는 루터와 분리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것이다고 했으며, 루터는 멜란히톤에 대하여 나는 폭도들과 싸워야만 했기에 내 책들은 매우 전투적이다. 나는 길을 닦아야만 하는 거친 선구자이다. 그러나 필립은 부드럽고 우아하게 뒤따라오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가지고 씨를 뿌리고 정성스럽게 물을 주었다고 했다. 서원모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신학적으로 도운 멜란히톤의 공헌을 세 가지로 명시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있는 동안 멜란히톤은 루터를 도와 신약성경을 번역하도록 조언했고, 훗날 루터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옮길 때에도 그를 도왔다. 1521년 멜란히톤은 루터의 정신위에 신학의 내용을 새롭게 구성한 개신교 최초의 신학교과서(조직신학)신학총론을 저술했다. 그리고 1530년 멜란히톤은 루터의 신학에 충실하면서도 모든 정파와 대화하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작성했는데 바로 아우스그부르크 신앙고백이다살아서 늘 함께 종교개혁의 동지로서 사역의 삶을 살았던 그들은 죽어서도 그들의 종교개혁의 터전인 비텐베르크 성()’ 교회당 안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평신도 설교학자 멜란히톤
멜란히톤은 성직임명을 받지 않아서 정식 설교자는 아니지만 설교자들의 선생으로서 귀중한 사역을 하였다. 그는 성직을 받지 않았기에 설교를 안 한 것이지, 설교의 능력이 없어서는 아니다. 멜란히톤은 설교 작성 기술에 대하여 목회자 후보생들을 가르쳤다. 한번은 목회자 후보생을 심사한 후 울면서 말하길 나는 가련하구나! 글로서는 내 사상을 전 세계 앞에서 표현하는 것도 두렵지 않지만, 얼마 되지 않는 소수의 회중 앞에서 설교하는 작은 일 조차 할 수 없구나. 설교가 단순히 기술이라면 나도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멜랑히톤은 성직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그의 설교학에 대한 저술은 매우 훌륭했다.
벤거트(Timothy J. Wengert)설교학 사전에서 멜란히톤이 설교학에 공헌한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멜란히톤은 수사학과 주석을 출간함으로 16세기 종교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519년에 그는 수사학에 관한 첫 번째 책(De Rhetorica libri tres)을 출간했고, 2년 후에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수사학에 관한 책(Institutiones rhetoricae), 1531년에는 기초수사학(Elementa rhetorices)을 출간했다. 1551년에는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 대한 설교주석을 출판했다멜란히톤은 수사학을 통하여 설교학에 큰 도움을 주는 수사학적 설교학의 기초를 다진 귀중한 평신도 설교학자였으며, 그 당시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 있는 설교자들에 좋은 설교학 스승으로서 아름답게 자리매김을 하였다.
 
나가는 말
멜란히톤의 설교를 연구하면서 그의 인격과 인성의 훌륭함에 대하여 또한 설교에 관한 그의 겸손절제가 아름답게 돋보인다. 설교에 관한 신학적 소양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성직에 임명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설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다. 요즘 평신도 설교자의 설교권에 관한 문제가 수면위에 떠오르고 있다. 목회자의 설교가 평신도들의 영적 해갈에 만족을 주지 못함도 있을 수 있고, 전문적 식견을 가진 평신도의 간증설교를 듣고자하는 바램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멜란히톤이 보여준 절제의 미덕겸양의 덕이 한국교회에 채워져서 영적질서의 모습이 재현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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