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의 선교사이야기- 괴테 선교사

대전대학을 위해 봉사한 과학자 괴테 선교사
기사입력 2017.06.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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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선교사이야기
대전대학을 위해 봉사한 과학자 괴테 선교사
최근 백석대학교 이정순 교수에 의해 괴테박사를 기념하는 과학자 괴테 박사의 한국선교이야기(CLC, 2016. 10)가 출판되었다. 이 박사님에 의해 괴테 박사가 어떤 분인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지만, 내가 괴테 박사를 처음 듣게 된 것은 50년 전인 1966년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때 새로 부임하신 과학 선생님이 대전대학을 갓 졸업한 분이셨는데, 그를 통해 괴테 선교사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Goethe, 1749-1832)와 발음이 같아 늘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한국이름 계이돈으로 널리 알려진 괴테 박사(Dr Robert L. Goette, 1929- )1960921일 내한했다. 31살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부산항으로 입국한 것이다. 그는 이미 과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238개월의 나이로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세계 최초로 나일론 섬유를 개발한 세계적 화학회사인 듀퐁(DuPont, USA)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삶은 풍요로웠다. 자가용 경비행기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29세 때 자신이 조정하는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입었었으나 목숨을 구했고, 이때의 경험 때문에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 마치 루터가 스터텀하임에서 낙뇌로 친구가 사망하는 일을 경험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고민했던 경우와 흡사하다. 루터가 이 일로 수도사의 길을 결심하고 아우구스티누파 수도원에 입단했듯이 괴태 박사는 듀퐁사를 그만두고 버지니아주 기독교교육 장로교학교에서 1년간 훈련 받았다. 그러던 중 대전대학 초대 학장이었던 인돈(仁敦), 곧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 1891-1960) 박사로부터 화학과 설치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린튼은 1912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군산 전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중 1922년에는 유진 벨(E. Bell) 선교사의 딸과 혼인하였고, 남장로교 선교학교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1956년 대전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린튼으로부터 대전대학 사정을 듣게 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평신도 선교사를 자원하였고, 미국남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고 내한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1987219일 한국에서 떠나기까지 27년간 한국에서 자연과학 분야, 특히 화학과 교수로 봉사하며 인생의 황금기를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가 내한하여 일한 기간은 한국의 격동기였다. 4.19 혁명으로 어수선한 상태에 내한하여 5.16을 경험하였고, 민주화운동과 산업화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과학자로서 오직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면서 한국사회에 기독과학자 혹은 기독 인재양성에 기여하였다. 그는 1976년부터 성경과 과학이라는 강좌를 개설하고 강의하기 시작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것이 우리나라에서의 창조과학회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정직하고 신실했다. 그 일예가 볼펜 사용인데, 그는 양복저고리 포켓에 항상 2개의 볼펜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강의실에서 출석을 부를 때는 학교에서 지급한 볼펜을 사용하고, 사적인 일을 메모할 때는 자기 소유의 볼펜을 사용했을 정도로 공과 사가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경비행기까지 소유했던 부유한 삶을 살았으나 선교지민의 현실을 이해하고 평생 새 옷을 입지 않을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헌 옷과 헌 가방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교수로서도 성실했기에 철저하게 수업을 준비했다. 1년 전부터 강의 내용을 준비했고 1시간 강의를 위해 3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는 정규 교과를 통한 교육활동 만이 아니라 개인전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지도자훈련과정을 실시하고 신앙교육과 훈련을 실시하는 등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교육 자체가 기독교적 가치의 구현이었고, 가르침 자체가 신앙교육이었다. 그의 언행일치의 기독교적인 삶이 바로 전도였다고 한다. 그는 훌륭한 교수이자 탁월한 학자였다. 그는 60년대 초 미국대학 기준의 의한 실험실을 구비하고 선진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대전대학은 1972년 문교부로부터 우수실험대학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1966년에는 국내에 첫 자연과학연구소를 설치하여 한국에서 대학 내에 연구소 설립을 선도했고, 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도왔다고 한다. 특히 그는 기독교세계관에 기초하여 교수하여 대전대학을 굳건한 기독교대학으로 육성했다.
한국에서 27년간 봉사했던 그는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계하여 1987년 한국을 떠난 이후 대학 측의 계속적인 내한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고, 자신의 사진이 학교에 걸려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진은 없애라고 요청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자녀들도 한국을 위해 봉사했는데, 사위는 1981-83년 한남대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한국에서 성장한 장남 로버트는 목사가 되어 한인 2세를 위해 목회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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