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의 선교사 이야기 '언더우드 가문의 한국선교'

기사입력 2017.04.28 13:5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1. H. H. Underwood (원한경)

원두우 선교사의 독자가 H. H. Underwood(1890-1951), 곧 원한경인데 그도 선대에 이어 제2대 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했다. 그도 아버지처럼 원한경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대구에서 중학교 학생이던 1966년 그의 대한 기록 영화를 본 일이 있다. 원한경 선교사가 깨끗한 한복에 갓을 쓰고 여행하는 모습, 특히 경주 불국사를 방문한 모습과 한옥에서 한국식으로 음식을 드시고 숭융을 마시던 모습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1890922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한국에서 중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그는 16세가 되던 해 한국을 떠나 프랑스, 스위스 등지에서 1년간 수학하고 미국으로 가 아버지가 공부한 뉴욕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에 이어 자신도 선교사의 길을 다짐했다. 22세가 되던 19129월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내한하여 아버지를 이어 제2대 선교사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경신학교에 교수로 부임하여 영어와 역사를 교수했으나 1915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1916년 부친 사망 시 미국으로 가 교육학을 더 공부한 후 1917년 내한하여 연희전문학교 전임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영어 철학 교육학 심리학 등을 강의하였고, 1917년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행정과 운영을 맡기도 했고, 193410월부터는 이 학교 교장으로 일하는 등 교육선교사로 일생을 살았다. 1919년 당시는 수원의 제암리 학살 사건을 폭로하여 일제의 포학을 알리고 해외에서 조선에 대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1년에는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를 계기로 자신의 역할이 중차대함을 인식하게 된다. 19236월에는 부친이 편찬했던 영한자전을 증보하고, 한글관련 문법서를 개정하기도 하는 등 한국학 연구에도 정열을 쏟았다. 1923년 미국으로 가 뉴욕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1924.6) 받았고, 19256월에는 Modern Education in Korea 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34년 이래로 에비슨 박사에 이어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으로 일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명예교장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해 12월에는 일경에 체포되어 10일 간 구류처분을 받기도 했고,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고 결국 강제 추방되었다. 그 후 미국에서 지내던 중 19443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해방을 맞게 되자 19459월 미육군성 관할 하의 한국어 통역관으로 임명받아 다시 내한하였고, 곧 미군정장관 아놀드 중장의 통역 및 고문으로 임명된다. 19468월에는 연희대학 명예총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에는 미군정청 교육부장관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나 7개월 후 든 군정 업무를 마감하고 연희대학으로 복귀했다. 그의 주된 업무는 연희대학의 복구와 확장 그리고 재정 동원 및 대외 관계였다. 당시 총장이 백낙준 박사였다. 얼마 후 불행한 일을 겪게 되는데 1949317일 그의 아내 에델 반 와그너(Ethel van Wagoner, 1888-1949)는 좌익청년들에 의해 피살된다. 부인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고 5월 귀국했는데, 6.25 동란이 발발했다. 195010월 한국으로 돌아와 미국심리전 G-2’의 민간고문자격으로 일하던 중 과로와 심장병으로 195122061세의 나이로 부산에서 사망했다. ‘조선의 선박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그는 사망 직전 까지 이순신에 대한전기를 집필 중이었다고 한다. 그도 역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슬하에 5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이 호레이스 그랜트(원일한, 1917-2004)였고, 차남 제임스(원제한, 1919- ), 3남 존 토마스(원요한, 1919-1995), 4남 리차드 프레드릭(원득한, 1927- ), 장녀 그레이스(원은혜, 1929- )였다. 이중 장남과 3, 4남이 한국선교사로 일했다.
이상규.gif
 
<저작권자ⓒe뉴스한국 & www.enkorea.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51899
 
 
 
 
  • e뉴스한국(http://enkorea.kr)  |  설립일 : 2003년 6월 20일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298 부산 YWCA 304호
  • 발행인 : 박수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미정
  • 사업자등록번호 :  605-90-93848
  • 대표전화 : 051-462-5495 [오전 9시!오후6시 / 토, 일, 공휴일 제외(12시~1시 점심)]  |  메일주소 : enews88@hanmail.net
  • Copyright © 2007-2009 enkorea.kr all right reserved.
e뉴스한국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