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현 교수의 설교로 보는 종교개혁(4)

기사입력 2017.04.2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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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John Wyclif)의 설교세계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은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시대적상황이 있었다. 인쇄술과 같은 과학문명의 발달,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발흥, 그리고 교황권의 쇠락과 교권의 부패 등이다. 또한 1507년에 루터를 시발점으로 종교개혁이 강력하게 일어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으로는 종교개혁의 세례요한역할을 했던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종교개혁의 샛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4-1384),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s, 1373-1415), 예언자적 설교로 개혁을 시도한 기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25-1498)등이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유능한 교회정치나 행정가로서 아니라, 개혁을 알리는 위대한 설교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종교개혁의 새벽별’(The Morning Star of the Reformation) 이라고 불리우는 존 위클리프가 바로 종교개혁의 여명을 여는 디딤돌의 역활과 선봉(先鋒)에 서 있었다.
 
개혁자로서의 생애
존 위클리프는 영국의 요크셔(Yorkshire)주의 리치몬드(Richmond)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출생연도, 이름철자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이, 그의 유년시절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교양있는 가문출신이며, 옥스퍼드의 베이리얼 대학(Balliol College) 의 학생이었으며, 훗날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아, 그 대학의 교수로서 사역하였다. 1361년에 사제로서 서품을 받고, 1374년에 국왕은 루터워스(Lutterworth)의 교구목사로 그를 임명했고, 거기서 한평생을 살았다. 1377년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교회의 부패를 신날하게 비판함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그는 1384년에 미사집전 중 심장마비(stroke)로 쓰러져서 수일 내 주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위클리프의 개혁의 중요한 주장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이었다. 첫째, 교황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었다. 예를 들어 면죄부 판매, 연옥교리, 고해성사, 성찬의 미신화, 성자숭배, 성직자의 타락, 그리고 화체설(化體設)에 대하여 그의 장점인 치밀하고 정교한 산문(散文)적인 기술과 통찰력, 학적인 논문발표와 설교를 통하여 반박했다. 둘째, 그는 단순히 교황권의 부패와 로마 가톨릭의 제도를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성경이 신앙생활과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올곧게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당시 회중이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의 성경인 라틴어 성경(Vulgate)을 생생한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도하여 회중들이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 하도록 하였다이는 성경이 교황과 어느 교회 회의보다 더 중요한 규범이라고 주창한 것에 대한 실천이며, 중세시대의 잘못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한 실천적인 개혁운동이었다.
그 결과 위클리프는 교황의 미움을 받게 되어 드디어 정신적인 사제지간인 후스를 파면한 콘스탄츠 회의(the Council of Constance)에서 1415년에 이단으로 정죄 받아 그의 저서는 금서조치 당했으며, 그의 시신이 파헤쳐 부관화형을 당한 후 유골은 루터워스에 위치한 스위프트 강(River Swift)1428년에 뿌려졌다그러나 그의 죽음은 절대로 헛되지 않고 체코의 개혁자 후스나 마틴 루터의 개혁운동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심지어 루터는 우리는 모두 후스파이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위클리프의 개혁운동은 종교개혁의 샛별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후세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위클리프의 설교의 특징들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기수로서 뿐만 아니라, 탁월한 종교개혁의 샛별로서의 설교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음은 그의 설교의 특징들이다. 첫째,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중세시대의 제도와 형식에 갇힌 진부한 미사 중심에서 설교중심으로 구심점의 전환을 도모하였다. 팬트(Clyde E. Fant)와 핀슨(William M. Pinson )세계명설교대전집(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에서 위클리프가 주장한 설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인간이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the highest service)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이다. 이러한 서비스는 특별히 성직자에게 주어졌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하신다. 예수께서도 다른 일을 떠나 자신이 대부분 설교를 담당하셨고 사도들도 그렇게 했다. 교회는 설교하는 것으로 영광이 되고, 설교는 성직자들이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이다. 그래서 성직자가 자기 회중에게 설교하지 않거나 설교를 방해한다면 이는 주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는 성직자의 죄에 해당된다고 했다. 그는 미사 중심의 로마가톨릭의 약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설교의 고귀성과 강단의 중요성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둘째, 성서의 권위를 강조한 설교였다. 다간(Edwin C. Dargan)은 말하길 그의 설교는 성경에 근거를 두었다고 했다. 그의 신학도 성경에 기초한 실천신학적 성격이 강했을 뿐 만 아니라, 더더욱 설교는 철저히 성경에 기초한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성서가 교황의 칙령이나 어느 교리보다도 더 중요하기에 설교는 성서의 말씀의 기초위에서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신행일치의 본을 보였다. 그의 설교는 성서에 기초한 강해식 방법”(expository method)을 사용하였으며, “스콜라주의 성격이 짙은 라틴어 설교와 달리, 영어설교들은 성경에 기초한 실제적이고 대중적인 설교였다패티슨(T. Harwood Pattison)History of Christian Preaching에서 그가 조직한 가난한 사제들’(Poor Preachers)에 대하여 말하길 이들은 성경에 대한 충성된(loyal) 자들이다라고 칭하였다. 성경 중심의 그의 설교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설교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성경의 기치를 높이든 종교개혁의 여명의 빛이었다.
셋째, 일반회중에게 기꺼이 찾아가서 깊이 접목하는 소통하는 설교였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생생한 영어로 번역하여 영어로 회중들에게 설교하였고, 중요한 설교 모임을 조직했다. 위클리프는 영국전역에서 가난한 사제들’, 혹은 검소한 사제들’(simple priests) 모임을 조직해서 설교여행을 다녔다. 이는 교회단체는 아니지만, 인격적으로 교육받은 복음주의자들로서 권서인(coporters)이었다. 그들은 영어로 간단하게 복음을 소개해주고 가르치며, 위클리프의 저서를 소개해주고 회중에게 설교했다즉 위클리프와 그 조직은 영어권 회중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직접 듣고 만나게 해주는 복음적 교량 역활을 하였다. 이는 회중과 소통하는 대중적 설교’, ‘찾아가는 설교의 한 유형으로서 현대설교에도 접목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위클리프 설교의 단점으로 그의 설교는 아직 중세시대의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라틴어 설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논리에 의거한 지나친 이성과 사변에 의존하는 스콜라식 설교를 하였으며, 풍유(諷諭)적인 성경해석, 즉 알레고리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는 설교였다또한 설교권의 지나친 허용과 확대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나가는 말
위클리프 설교를 연구하면서 현대설교에 적용 가능한 요소들로는 강단의 중요성을 어느 때보다도 강조하며, 성경의 권위를 기반으로 하는 설교, 그리고 회중과 소통하는 설교가 무던히도 필요한 시점에 놓여있다. 후스와 루터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제 2의 위클리프의 설교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강단에 깊숙이 적용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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