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춘식 교수/월드미션 28년 [2]

먼저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했다
기사입력 2024.02.19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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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미션 28(2)

먼저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했다

 

먼저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했다. 세계선교에 대한 새로운 기도제목이 주어졌다. 당시 매주 금요일 저녁 철야기도회를 인도할 때 교단 총회에서 대만에 파송했던 이병길 선교사(주 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때였다. 참석한 교우들은 빠짐없이 뜨겁게 기도했다. 그 기도의 간절함 덕분이었을까? 평소 세계선교에 대해서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나로서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당시 등촌교회에서는 5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시기였다. 매월 개인당 엄청난 선교비를 선교본부 통합계정으로 책임지고 보내던 시기였으니... 1989년 자녀들은(형빈 7, 에스더 6) 등촌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가족과 자녀들에게 장래의 뜻을 전하고 선교 준비단계에 필요한 길이 열리도록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령님께서도 함께 하셨다. 대외적인 교량이 열리는 곳이 [바울선교회]였다. 나는 세계선교에 대한 그렇게 많은 단체를 알지 못하던 터라, 바울선교회 대표이신 이동휘 목사님에 대한 소개를 받았을 때, 그분의 현장 목회사역(전주 안디옥교회)과 선교정신을 의문시할 까닭이 없었다. 그분을 향한 나의 존경심은 복잡하지 않았다. 여기에 기억을 모두 기록할 수는 없지만 전주 안디옥교회는 1983327일 개척되었다. 그 다음달 417일에 곧장 세계선교를 시작함으로써 설립의 이념을 실천하는 교회가 된다. 최초의 해외선교지는 중국, 필리핀, 태국, 마카오 그리고 인도네시아 등 주로 동남아 지역이었다. 무엇보다 안디옥교회의 선교교육 지침이 나를 한층 매료시키며 신뢰를 안겨다주었던 것이다.

 

첫째, 선교준비가 완료된 교회였다. 이동휘 목사의 선교교육론과 메시지의 목표, 공동체의 비전은 한 치의 오류가 없이 신학교에서 꿈꾸며 학습했던 그대로였다. 그는 한국의 목회자로서 이 시대에 세계선교의 주역이 한국교회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선교목회 즉 선교적 삶을 살기위해 교회의 대전환을 시도하는 확신에 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의 위상을 전적으로 지역교회 목회자의 어깨 위에다 짐 지웠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을 본인이 달게 지고 있었다. 둘째, '바울선교회'를 통한 국내·외 선교사 훈련기관의 마스터플랜을 이미 조직해 놓은 터였다. 19863월 초교파로 선교회가 발족되고 8711월에는 마닐라에 선교사 국제언어훈련원(PMTI, 현재는 MOC)을 개원했다. 셋째, 평신도의 선교요원화였다. 그는 안디옥교회 앞에 부르짖기를 우리는 모두 선교사요 전도자요 사찰(관리인)이다라는 구호를 즐겨 사용한다. 1천 명의 장년 교인이 모일 때까지 단 한 명의 부교역자도 없이 성도들과 함께 교역에 임했다고 한다. 이러한 긴박감이 교인들의 활성과 동원화에 그리고 사역자로서의 한결같은 사명감으로 동고동락해 왔다는 사실이다.이로써 나에게 공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무엇이기에 동기부여와 준비의 날에 까닭을 더 질문할 수 있었겠는가! 주여,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6:8)이야말로 제단에서 날아온 화저가 나를 더욱 달구었고 기도로써 입술을 정화시켜 주었다. 나는 이러한 초교파적 성격의 선교단체에 대한 것과 한국 목회자로서의 반듯했던 이동휘 목사에 대한 허심탄회한 대화를 담임이셨던 박현진 목사님과 오랜 날들 밤이 깊도록 나누었다. 아내도 내가 받은바 감동과 간증을 다 듣고서 유쾌히 동의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의 해외선교의 첫 입문은 박 목사님과 아내 두 사람의 승낙을 통해서 가속화되었다. 벌써 35년 전의 일이다.

 

바울선교회의 선교사 후보자 허입 시험은 4과목이었다. 교의신학 중의 기독론과 영어, 성경고사, 면접으로 기억된다. 무난히 통과되었나보다. 합격자는 정순성(필리핀), 서태환(필리핀), 함용욱(멕시코) 그리고 윤춘식 목사(아르헨티나) 부부였다. 필자만 빼고는 모두들 지금까지 현장에서 선교하고 있는 기라성 같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우리는 그날 이후 세계 속에서의 한 가족이 됐다. 전주시외의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은 <이랑공동체>와 강원도 산촌에서 교회당이 없는 촌락에다 기독교 <이동 도서관>을 펼치고 있던 아주 훌륭한 목사님을 만나기까지, 세상에 그런 지도자가 우리를 기다려주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헤쳐가야 할 과제가 생겼다.

전주 안디옥교회가 기독교장로회(기장)측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큰 문제가 될 리는 없었다. 신앙고백과 세계선교의 사명과 대의는 교리시대의 논쟁을 되풀이하지 않으며, 당시의 양대 산맥에서 서울 등촌교회 역시 한 교단을 미션으로써 섬기는 동시에 총회의 부총회장을 모시는 선교중심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훗날 이동휘 목사는 박현진 목사를 선교대회에 초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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